신의 이러한 타자성
이러한 관점에서만 신에게 공손하고 신중하게
접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 타자로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단순히 다른 타자가 아니라 전혀 인간 타자와 다른 타자이기 때문이다. ...
... 신은 현상학적 경험과 서술의 모든 형태로부터 뿐 만 아니라, 인간 타
자를 일으키는 모든 방법으로부터 언제나 그리고 이미 벗어나 있다.”140)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신은 단순히 ‘최초의 타자’ 또는 ‘탁월한 타자’ 혹
은 ‘절대 타자’가 아니라, 타자와는 다른 타자, 타자의 타자성에 앞서며 이
웃에 대한 윤리적 의무에 앞서고 부재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초월적이고
익명적 있음(il y a)의 소란스런 이동과의 가능한 혼동에 이르기까지 초월
적인 타자성에 의한 타자이다.”141) 신은 “드러나지도 않고 현재적이지도
않지만, 항상 이미 있었던” 타자이다. 신은 비대상적이고 비가시적인 무한
성이다. 신은 익명적 무한성이다.
신의 이러한 타자성을 설명하기 위해 레비나스는 신을 가리키는 독특한
삼인칭 용어를 만들어냈다. 프랑스어의 ‘그’(il)와 라틴어의 ‘저것’(ille)을
합성해서 만든 ‘illeite’(illeity)가 그것이다. 말 그대로 ‘그-임’ 또는 ‘그것-
임’이 된다. 그임 또는 그것임을 나타내는 삼인칭은 신과의 직접적인, 인
격적인 혹은 친밀한 관계를 일체 거부한다.142)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대 신비주의의 특징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권위 있는 아
주 오래된 기도문에 보면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에게 ‘당신’이라는 말로
시작했다가 끝날 때에는 ‘그 분’이라고 한다. 내가 책에서 무한을 삼인칭
의 ‘그임’(illeity)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 속에 무한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
하는 주체가 무한을 증언한다. 이 증언의 진실성은 재현 또는 지각의 진
실성이 아니다. 이 증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무한의 계시이다.
무한의 영광이 찬미를 받는 것도 이 증언을 통해서이다. ‘영광’이라는 낱
말은 사변언어에 속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마틴 부버는 유대교에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
를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했다. 부버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삶에서 중요
한 것은 교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추상적인 모든 것, 신적인 것에
대해 삼인칭의 형태로 말해지는 것, 나와 너의 상대 저편에 있는 모든 것
은 단지 개념적인, 그래서 구성된 수준에서의 투사일 뿐이다.” 이것은 레
비나스의 삼인칭 관계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실제 그는 부버의 일인칭-이
인칭 관계를 비판한다. 이처럼 너무 친밀하고 직접적인 말은 보다 형식적
인 삼인칭 관계에 부적절하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신은 현존도 부재
도 아닌 삼인칭 속에서만 희미하게 감지되지만, 무한하게 가깝고 절대적
으로 먼 하나의 흔적이다. 삼인칭은 가장 멀리 있는 타자성이다. 또한 신
의 형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삼인칭의 흔적 속에 서 있는 것이다.
신은 최고의 타자가 아니라, 부재의 조건, 혹은 [...] 타자와의 만남의 무조
건이다.”144) 레비나스가 보기에 마틴 부버가 말하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
는 존재론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결국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신의 개념을
파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은 윤리학에 의해 대체된다.